▲ 2011년 출시한 엘더스크롤 V: 스카이림(왼쪽), 배틀필드 3(오른쪽)
출처: gamewatcher.com
▲ 왼쪽: 지포스 GTX 580, 오른쪽: 라데온 HD 6970
다음 세대는 TSMC 32nm 공정을 사용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습니다. TSMC가 32nm 공정 개발에 실패하고 바로 28nm 공정으로 이행을 발표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신제품 없이 2년을 허송세월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으므로 양사는 다시 한번 40nm 공정을 사용하여 신제품을 출시합니다.
이때부터 AMD는 ATi라는 이름을 버리고 드디어 AMD 라데온을 사용하기 시작합니다. 2010년 말, AMD 라데온 HD 6800 시리즈가 출시됩니다. 다만, 최상위 등급이 아닌 한 등급 낮은 제품이었는데, 판매량이 높은 하위 등급에서 지포스 GTX 460의 공세가 대단했기 때문입니다. 구성은 이전 세대보다 못하지만, 최적화를 통해 더 적은 코어 수로도 높은 성능을 발휘하는 데 성공합니다.
이 시기 연달아서 엔비디아와 AMD는 그래픽카드를 출시하는데, 최상위 모델은 지포스 GTX 580과 라데온 HD 6970입니다. 성능은 지포스 GTX 580이 더 좋았지만, 각자 2개 칩을 사용한 듀얼 그래픽카드, 지포스 GTX 590과 라데온 HD 6990간의 싸움은 라데온이 승리합니다. 지포스 GTX 580의 클록을 엄청나게 낮춰서 탑재할 수밖에 없었던 GTX 590에 비해, 크로스파이어의 더 높은 효율에 더해서 라데온 HD 6990은 HD 6970의 클록을 그다지 낮추지 않고 완성해냈기 때문입니다.
이 시기 재미있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바로 라데온 HD 6950에 관련한 이야기입니다. 라데온 HD 6950은 HD 6970과 같은 코어를 사용하면서 일부 구성을 비활성화한 제품인데, HD 6970 바이오스를 덮어씌움으로써 HD 6970으로 되살려내는 사례가 생겼습니다. 심지어 HD 6900 시리즈는 듀얼 바이오스를 지원하므로, 실수로 바이오스 업데이트에 실패하더라도 다시 되살리는 게 쉬운 제품이었습니다. 불안정한 제품도 있었지만, 실패해도 본전이었으므로 HD 6950은 잠깐 인기를 끌었습니다.
▲ 2012년 출시한 디아블로 III(왼쪽), 파크라이 3(오른쪽)
출처: gamewatcher.com
▲ 왼쪽: 지포스 GTX 680, 오른쪽: 라데온 HD 7970
드디어 2012년, 28nm 공정을 사용한 그래픽카드가 출시되기 시작합니다. 첫 번째 타자는 AMD가 수년간 사용해온 테라스케일 계열을 벗어난 새로운 아키텍처, GCN(Graphics Core Next)을 사용한 라데온 HD 7970입니다. 이전 세대보다 압도적으로 뛰어난 성능을 자랑하긴 했지만, 가격도 압도적으로 높아졌습니다. 하지만 엔비디아는 아직 신제품을 출시할 수 없었고, 새로운 제품에 목말라 있던 소비자들은 HD 7970을 구매했죠. 거기에 엔비디아가 출시하지 않은 지포스 GTX 680의 뛰어난 성능만 광고하는 터라 의심의 눈초리만 심해졌습니다.
하지만 3월에 케플러Kepler 아키텍처의 지포스 GTX 680이 출시되자 모두 경악을 금치 못했습니다. 라데온 HD 7970보다 성능이 좋으면서 가격, 온도, 소음은 낮은 제품이었으니까요. 이는 설계 방향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AMD는 GCN을 개발하면서 그동안 소홀했던 범용 연산 성능에 중점을 뒀고, 엔비디아는 반대로 GTX 680에서 오직 게임에 집중했습니다. 결국 한 등급 낮은 지포스 GTX 670에 라데온 HD 7970이 따라잡히는 지경에 이르렀고, AMD는 가격 인하와 함께 HD 7970 GHz Edition이라는 클록업 버전을 출시해서 대응하지만, 소비전력에서는 뒤처지는 상황이 이어집니다.
다만, 시간이 갈수록 AMD 그래픽카드는 드라이버 업데이트를 통해 부진했던 게임들의 최적화 및 성능을 착실하게 높여갔고, 2013년부터는 경쟁사 제품보다 뒤처졌던 성능을 만회하면서 본격적인 성장형 그래픽카드의 면모를 드러내기 시작합니다.
2013년 엔비디아는 한 가지 상징적인 제품을 선보이는데, 바로 지포스 GTX TITAN입니다. 지금은 상상하기도 어렵지만, 그때까지 최상위 싱글 칩 그래픽카드의 가격은 아무리 비싸야 500달러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지포스 GTX TITAN은 그보다 2배 비싼 999달러로 출시된 최초의 모델입니다. 심지어 그래픽 메모리 용량이 6GB였는데, 이는 이전까지 출시된 게이밍 그래픽카드의 2~3배인 엄청난 크기였습니다. 성능은 지포스 GTX 680 칩을 2개 사용한 GTX 690과 얼마 차이 나지 않고 칩을 한 개만 사용했으므로 멀티 GPU에 있는 단점이 없는 굉장한 제품입니다. 동시에 전문가용 그래픽카드만 지원하던 일부 연산기능을 지원하여 대학교나 기업에서 인기리에 판매되었습니다. 일반 소비자에게는 비싼 가격이지만, 전문가용 그래픽카드인 쿼드로Quadro의 엄청난 가격을 보면 전문가에게는 가성비가 높은 제품이었죠.
▲ 2013년 출시한 크라이시스 3(왼쪽), 배틀필드 4(오른쪽)
출처: gamewatcher.com
▲ 왼쪽: 지포스 GTX 780 Ti, 오른쪽: 라데온 R9 290X
2013년에 출시한 신제품은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양사 모두 이전 세대와 같은 아키텍처를 사용하면서 일부 상위모델에만 새로운 칩을 사용합니다.
2013년 5월, 엔비디아는 지포스 GTX TITAN에 사용된 빅칩 케플러의 구성을 줄이고 메모리 용량도 반으로 낮춘 지포스 GTX 780과 GTX 680의 클록을 높인 GTX 770을 출시합니다. 지포스 GTX 780은 GTX TITAN보다 저렴하면서 성능은 그다지 차이 나지 않아서 GTX TITAN을 구매한 일반 소비자들을 실망시킵니다. 반면 GTX TITAN이 비싸서 그림에 떡으로 여기던 소비자들에게는 환영받았죠.
같은 해 8월에 AMD도 새로운 제품을 출시하는데, 이미 HD 해상도가 특별하지 않은 시대가 되었으므로 이름을 바꿉니다. 처음으로 등장한 제품은 라데온 HD 7970 GHz를 리네이밍한 R9 280X와 하위 제품들입니다. HD 7970과 태생이 같은 만큼 지포스 GTX 770에 대응하는 제품으로 대신 더 저렴한 가격으로 출시합니다. 하지만 지포스 GTX 780을 상대할 제품을 출시하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했고, 2013년 말까지 이런 상황이 이어집니다.
그리고 비로소 2013년 말, 새로운 칩을 사용한 라데온 R9 290X를 출시합니다. 지포스 GTX TITAN에 필적하는 성능이면서 가격은 절반밖에 안되는 제품이죠. 하지만 R9 290 시리즈에 처음 탑재된 기본 쿨러는 엄청난 소음에 90도가 넘는 온도로 사이버포뮬러 조롱 영상까지 만들어질 정도로 악명이 높았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성능은 확실히 좋았으므로, 엔비디아는 최상위 모델인 지포스 GTX 780 Ti를 출시하여 그래픽카드 시장은 뜨거운 전쟁터가 됩니다.
▲ 라데온 R9 290X 사이버포뮬러 영상
▲ 2015년 출시한 폴아웃 4(왼쪽), 위쳐 3(오른쪽)
출처: gamewatcher.com
▲ 왼쪽: 지포스 GTX 980 Ti, 오른쪽: 라데온 R9 Fury X
원래대로라면 TSMC 20nm 공정을 사용했어야 할 차세대 제품이지만, 이번에도 공정 개발에 난항을 겪으면서 28nm를 또 사용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과거 40nm 공정 때가 생각나는데, 사실 같은 상황입니다.
2014년 말, 엔비디아 케플러와 같은 28nm 공정의 맥스웰Maxwell 아키텍처 그래픽카드, 지포스 GTX 980, GTX 970을 출시합니다. 공정은 그대로였지만, 코어당 효율을 극한으로 끌어올리는 맥스웰 아키텍처를 사용하여 이전 세대보다 성능을 높이면서 소비전력을 낮추는 엄청난 업적을 이뤄냅니다. 다만, 게임 성능에 집중한 나머지 연산 성능은 이전 세대보다 떨어지긴 했지만, 일반 소비자에게는 문제가 아니었죠.
한편 AMD는 좀처럼 신제품을 출시하지 못합니다. 2015년 중순이 되어서야 라데온 300 시리즈가 출시되었는데, 이전 라데온 200 시리즈 제품의 클록과 메모리 용량을 늘리는 형태로 출시합니다. 새로운 칩을 사용한 건 숫자 네이밍이 아닌 라데온 R9 Fury X입니다. GDDR 대신 HBM이라는 적측형 메모리를 최초로 사용한 제품인데, 정작 성능은 지포스 GTX 980 Ti보다 떨어지고 가격은 같아서 이 시기 라데온 그래픽카드의 좋지 않은 평가에 일조합니다.
▲ 라데온 R9 Nano
다만 HBM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제품이 하나 등장합니다. 바로 라데온 R9 Nano입니다. HBM 메모리는 GDDR 메모리와 달리 칩 바로 옆에 배치되므로 기판 공간을 크게 절약할 수 있습니다. 라데온 R9 Nano는 하이엔드급 성능을 갖추면서 길이는 15 cm 정도로 줄여서 게이밍 미니 PC를 구성하려는 소비자에게 인기를 끕니다.
▲ 2016년 출시한 다크 소울 3(왼쪽), 둠(오른쪽)
출처: gamewatcher.com
▲ 왼쪽: 지포스 GTX 1080, 오른쪽: 라데온 RX 480
2016년 5월, 드디어 새로운 공정과 새로운 아키텍처를 사용한 지포스 그래픽카드가 출시됩니다. 지금까지 명품으로 회자되는 파스칼Pascal 아키텍처의 지포스 10 시리즈입니다. 처음 출시한 제품은 지포스 GTX 1080인데, 이전 세대보다 월등하게 높은 성능에 소비전력은 낮아서 엄청난 반응을 이끌어냅니다. 다만, 이전에 레퍼런스 모델이라고 칭해지던 기본 모델을 파운더스 에디션(Founders Edition)으로 이름 짓고 더 비싸게 판매해서 여기서는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합니다.
반면 AMD는 한 달이 지난 6월에서야 4세대 GCN 아키텍처를 사용한 라데온 RX 480을 출시합니다. 하지만 제품 등급은 한없이 낮아서 메인스트림~퍼포먼스밖에 되지 않은 모델입니다. 다만, 아직 엔비디아가 출시하지 못한 등급을 저렴한 가격으로 선점하는 효과가 있었죠. 이전에 라데온 HD 3000, 4000 시리즈 시절을 떠올리시면 이해가 될 겁니다.
지포스 그래픽카드가 아직 출시하지 않는 틈새시장을 노리기로 한 라데온 RX 480이지만, 바로 한 달 뒤에 지포스 GTX 1060이 출시되면서 찬물을 끼얹습니다. 하이엔드 그래픽카드에서 경쟁자가 사라진 엔비디아는 8월, TITAN X를 출시합니다. 이전 맥스웰 세대에 지포스 GTX TITAN X가 있었는데, 이번에는 지포스와 GTX를 빼서 게임보다는 연산에 집중했다는 인식을 주는 제품이죠. 그렇다고 게임까지 소홀한 건 아니어서 지포스 GTX 1080보다 30%가량 높은 성능으로 최고 성능을 원하는 일반 소비자도 구매한 모델입니다.
이듬해인 2017년 3월에 TITAN X와 같은 빅칩을 사용한 지포스 GTX 1080 Ti가 출시됩니다. 그러면서 성능은 TITAN X보다 높았죠. 결국 엔비디아는 TITAN X를 단종시키고 풀칩을 사용한 TITAN Xp를 뒤이어 출시하면서 통수를 먹입니다. 사실 케플러 시절부터 이어지던 일이라 어느 정도 내성이 쌓여있을 법도 하지만, 많은 사람이 분노를 느꼈던 사건입니다.
AMD도 같은 시기에 라데온 RX 500 시리즈로 신제품을 출시하지만, RX 400 시리즈에서 클록만 높인 제품이라 절대적인 성능에서는 여전히 지포스 그래픽카드에 미치지 못합니다. 대신 다른 분야에서 활로를 찾는데, 바로 플루이드 모션Fluid Motion입니다. GCN 아키텍처 이후 라데온 그래픽카드에서 지원하던 동영상 프레임 보간 기능인데, 이를 일반 동영상 플레이어에서 사용할 수 있게 되면서 부드러운 영상을 원하는 소비자들이 많이 구매합니다. 엔트리~메인스트림 등급인 라데온 RX 460과 RX 560은 보조전원이 필요 없으면서 적당한 성능을 갖추고 있어 지포스 그래픽카드를 사용하는 소비자가 플루이드 모션을 위해 보조 그래픽카드로 구매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 왼쪽: 지포스 GTX 1080 Ti, 오른쪽: 라데온 RX Vega 64
7월에 드디어 하이엔드 등급 라데온이 출시됩니다. 바로 라데온 RX Vega 시리즈입니다. 라데온 RX Vega 64/56, 2개 모델인데, Vega 64는 지포스 GTX 1080, Vega 56은 GTX 1070에 대응하는 모델입니다. 성능은 어느 정도 지포스 그래픽카드를 따라잡는 데 성공했지만, HBM2 메모리를 사용했음에도 지포스 GTX 1080 Ti에 미치는 모델은 만들지 못하고 소비전력은 높다는 문제가 있는 제품이었습니다. 지포스 GTX 1080이 2016년 5월에 출시되었으니 무려 15개월의 격차가 있는 셈이죠. 하지만 아직 AMD가 하이엔드 그래픽카드 시장을 포기하지 않았다는 메시지를 보여주는 데는 충분한 가치가 있는 제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2017년 12월, 엔비디아는 파스칼을 잇는 차세대 아키텍처 그래픽카드를 출시합니다. 볼타Volta 아키텍처의 TITAN V입니다. 응? 지포스가 아닌데? 네 맞습니다. 볼타 아키텍처는 지포스로 출시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설명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는데, 바로 1세대 텐서Tensor 코어를 탑재한 그래픽카드이기 때문입니다. 텐서 코어는 AI 학습을 위한 딥러닝에 최적화된 코어입니다. 이 텐서 코어는 이후 등장하는 지포스 그래픽카드에도 탑재되어 엄청난 연산 성능을 요구하는 레이트레이싱Ray Tracing을 적용하면서도 원활한 게임 성능을 낼 수 있는 기술인 DLSS(Deep Learning Super Sampling)를 위해 사용됩니다. 동시에 파스칼 아키텍처에서 부족했던 연산 성능을 개선하여 부족했던 전문 연산 작업 성능까지 개선한 모델입니다. 즉, 전문가를 위한 그래픽카드죠. 가격은 TITAN Xp의 2배가 넘지만, 게임 성능이 10% 이상 높아서 저를 비롯한 일부 극성 게이머가 구매하기도 했습니다.
▲ 2018년 출시한 포르자 호라이즌 4(왼쪽), 몬스터 헌터: 월드(오른쪽)
출처: gamingbolt.com
엔비디아는 2018년 9월에 지포스 RTX 20 시리즈 그래픽카드를 선보입니다. 과거 지포스 8000 시리즈에 버금갈 정도의 기술적 특징이 있는데, 실시간 레이트레이싱을 지원하는 첫 번째 그래픽카드라는 점입니다. 따라서 접두사가 레이트레이싱의 첫 글자를 따서 RTX로 바뀝니다. 엔비디아가 이 그래픽카드에 얼마나 큰 기대를 걸고 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죠. 지포스 RTX 20 시리즈의 기반이 되는 튜링Turing 아키텍처에는 레이트레이싱을 위한 RT 코어, AI와 DLSS를 위한 텐서 코어를 내장하고 있습니다. 이를 통해 TITAN V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실시간 레이트레이싱과 원활한 게임 성능을 구현하기 위한 DLSS를 동시에 지원합니다.
하지만 일반적인 게임 성능은 이전 세대와 비교하여 큰 향상을 이루지 못합니다. 그동안 최신 70 모델이 전 세대 80 Ti에 필적하는 성능이었는데, 지포스 RTX 2080은 GTX 1080 Ti와 큰 차이를 보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가장 문제가 되는 건 가격입니다. 차근차근 높아지던 그래픽카드 가격은 이 시점을 시작으로 급격하게 비싸집니다. 지포스 GTX 1080 Ti가 699달러로 출시되었는데, RTX 2080이 699달러, RTX 2080 Ti는 최초의 TITAN과 같은 999달러로 출시되어 엄청나게 비난받습니다. 이건 최소 가격일 뿐이고, 파운더스 에디션이나 다른 제조사에서 출시하는 오버클록 모델은 이보다 더 비쌌으니 오히려 지포스 10시리즈의 평가가 오르는 결과까지 나타납니다. 성능은 그다지 높아지지 않았는데, 가격은 눈에 띄게 높아졌으니 당연한 일입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나아지긴 했지만, 지포스 RTX 20 시리즈 출시 초기에는 레이트레이싱이나 DLSS를 지원하는 게임이 많지 않아서 악평이 더 컸습니다.
▲ 2019년 출시한 디비전 2(왼쪽), 콜 오브 듀티: 모던 워페어(오른쪽)
출처: gamingbolt.com
지포스 RTX 20 시리즈가 악평에 시달리고 있던 2019년 1월, AMD는 전혀 뜻밖의 그래픽카드를 공개합니다. 최후의 GCN 아키텍처 그래픽카드, 라데온 VII입니다. 2년 전 출시한 Vega 시리즈와 마찬가지로 HBM2를 채용했는데, 수를 2배로 늘려서 무려 4,096-bit 인터페이스와 16GB 용량을 자랑하는 대단한 물건입니다. 게임 성능 자체는 뒤늦게 출시한 지포스 GTX 1080 Ti나 RTX 2080 정도로 평가할 수 있을 정도라 썩 좋지는 않지만, 하이엔드 시장에서 한 동안 자취를 감췄던 라데온이 오랜만에 등장했다는 데에서 그 역할을 충분히 했다고 볼 수 있는 모델입니다. 대신 작업 성능의 약진이 두드러졌는데, 칩 자체가 연산목적 브랜드인 라데온 인스팅트Radeon Instinct MI50에 들어간 Vega 20을 거의 그대로 사용했기 때문입니다. 동시에 세계 최초의 7nm 공정 게이밍 GPU이기도 합니다.
지포스 RTX 2070과 RTX 2060으로 하위 라인업을 채워나가던 엔비디아는 메인스트림 등급에서 신기한 네이밍을 사용합니다. 지포스 16 시리즈인데, RT 코어와 텐서 코어를 제외해서 이전 세대와 똑같이 GTX를 사용하고, 시리즈는 애매하게 15도 아닌 16이 되어버립니다. 레이트레이싱, DLSS 대신 게임에 집중한 지포스 16 시리즈는 이전 세대 엔트리~퍼포먼스 등급 그래픽카드를 성공적으로 대체하며 시장에 안착합니다.
문제가 발생한 건 슈퍼SUPER 시리즈입니다. 2019년 7월, 뜬금없이 지포스 RTX 2060, 2070, 2080 등급 뒤에 SUPER라는 접미사를 넣은 제품을 출시했습니다. 가장 처음 출시한 지포스 RTX 2080이 2018년 9월, 가장 마지막에 출시한 RTX 2060이 2019년 1월이니까 불과 1년도 되지 않은 시점에 그보다 성능이 높은 그래픽카드를 출시한 겁니다. 엔비디아 CEO인 젠슨 황의 이름을 딴 ‘황통수’라는 비아냥이 어느 때보다 잘 어울리는 제품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동안 이런 놀림을 받던 제품이 몇 개 있긴 했지만, 시기가 어느 정도 흘렀거나, 세대교체기여서 그다지 문제가 없었는데, 이건 해도 너무한 수준이었죠. 슈퍼는 이후 지포스 16 시리즈에도 출시하며 Ti보다는 낮은 업그레이드 모델 같은 이름으로 사용됩니다.
AMD는 2019년 7월, 라데온 HD 7000 시리즈부터 라데온 VII 까지 오랜 기간 사용해온 GCN 아키텍처를 대체하는 새로운 아키텍처 그래픽카드를 출시합니다. 최초의 RDNA(Radeon DNA) 아키텍처 그래픽카드, 라데온 RX 5700 시리즈입니다. 과거, 라데온 HD 4870, 4850을 떠올리게 하듯 하이엔드 대신 한 등급 낮은 시장을 노린 모델입니다. 라데온 RX 5700 XT와 RX 5700은 각각 지포스 RTX 2060 SUPER, RTX 2060과 가격은 같으면서 더 성능은 좋았습니다. 레이트레이싱 기능이 제외되긴 했지만, 해당 등급은 레이트레이싱 옵션을 말 그대로 맛만 볼 수 있는 수준이라 큰 단점으로 다가오지는 않았습니다.
해를 넘겨 2020년 1월에는 메인스트림 모델인 라데온 RX 5600 XT가 출시되는데, 출시 이후 무려 개선 바이오스를 2번이나 내놓은 이상한 그래픽카드입니다. 이렇게 된 이유는 바로 경쟁사, 엔비디아의 가격 인하 발표 때문입니다. 애초에 라데온 RX 5600 XT는 지포스 GTX 1660 Ti를 견제할 목적으로 출시한 제품인데, 갑자기 RTX 2060이 가격을 낮추는 바람에 한 등급 높은 경쟁사 모델과 경쟁해야 할 처지에 놓입니다. AMD는 이를 성능업 바이오스 배포로 맞섰고 신기하게도 지포스 RTX 2060과 괜찮은 싸움을 만들어 내는 데 성공합니다. 반대로 말하자면 이 정도로 성능이 높아질 정도로 클록 여유가 있다는 뜻이 되겠네요.
▲ 2020년 출시한 플라이트 시뮬레이터(왼쪽), 하프 라이프: 알릭스(오른쪽)
출처: gamingbolt.com
▲ 왼쪽: 지포스 RTX 3090, 오른쪽: 라데온 RX 6900 XT
2020년은 엔비디아와 AMD 모두에게 중요한 시기입니다. 오랜만에 양사가 최고의 그래픽카드 자리를 두고 경합하는 시대가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먼저 공격을 시작한 건 엔비디아입니다. 9월, 암페어Ampere 아키텍처의 지포스 RTX 3090과 RTX 3080이 출시되며 플래그십, 하이엔드 시장을 먼저 선점합니다. 점점 비싸지던 그래픽카드 가격은 이 시기 정점을 찍는데, 지포스 RTX 3090이 무려 1,499 달러에 달했습니다. 하지만 성능 또한 굉장했습니다. 출시 초기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던 지포스 RTX 2080 Ti보다 약 1.5배 좋은 엄청난 결과를 기록했기 때문이죠. 세대가 더해지며 완숙해진 레이트레이싱, DLSS 성능은 늘어난 지원 게임에 힘입어 지포스 그래픽카드의 또 다른 무기가 됩니다.
AMD는 신제품 출시가 조금 늦었는데, 출시에 앞선 발표회에서 엄청난 성능 향상을 보여준 지포스 RTX 3090과 RTX 3080을 저격하며 사람들의 기대를 한껏 부풀게 합니다. 마침내 조금 늦은 11월과 12월에 라데온 RX 6000 시리즈를 출시해서 발표대로 지포스 신제품 그래픽카드에 밀리지 않는 성능을 보여주는 데 성공합니다. 가격까지 경쟁사 제품보다 저렴했지만, 한발 늦은 레이트레이싱 지원과 256-bit로 제한한 메모리 인터페이스로 고해상도에 약한 모습을 보여주며 절반의 성공에 그칩니다.
그 아래 등급 시장은 엔비디아가 먼저 지포스 RTX 3070, RTX 3060 시리즈를 시작으로 라인업을 완성해 나갔고, AMD는 해를 넘겨 2021년 3월에 라데온 RX 6700 XT를 출시하며 그 뒤를 바짝 따라붙습니다.
▲ 2021년 그래픽카드 가격 추이, 출처: 3DCenter
2021년은 일반 소비자에게 최악의 한 해였습니다. 가파르게 오르던 암호화폐 가격이 이 시기 정점을 찍으면서 이를 채굴하기 위한 하드웨어, 그래픽카드가 시장에서 자취를 감췄기 때문입니다. 채굴용 수요가 엄청나서 그래픽카드 가격이 폭등, 메인스트림 그래픽카드 가격이 3배 가까이 오르는 말도 안 되는 상황이 펼쳐진 겁니다. 게이밍 그래픽카드가 전문가용 그래픽카드와 가격 차이가 얼마 나지 않던 웃기는 시대입니다. 과거 2017년에도 비슷한 일이 있기는 했지만, 기간이 얼마 길지 않았고 공급량이 굉장해서 의외로 큰 문제가 되지는 않았는데, 이때는 달랐습니다. 전 세계적인 코로나 바이러스 사태와 원자재 가격 상승으로 도저히 공급이 수요를 따라갈 수 없었고, 결국은 가격 상승과 품귀 현상으로 이어집니다.
이 시기 지포스 RTX 3080 Ti나 RTX 3070 Ti, 라데온 RX 6600 XT 같은 제품이 출시되었는데, 순식간에 시장에서 자취를 감춥니다. 채굴에 제한을 건 LHR(Lite Hash Rate)같은 제품을 출시해서 수요를 분산시키려 시도하지만, 공급이 원활하지 않으니 시장에 큰 역할을 하지는 못합니다. 심지어 2021년 말에는 이전 세대인 지포스 RTX 2060의 메모리를 12GB로 늘린 파생 제품이 출시되기에 이릅니다. 이런 최악의 상황이 진정되는 건 해를 넘겨 2022년 3월 이후가 됩니다.
출처: 인텔
2022년 6월, 엔비디아와 AMD로 이원화되어있던 외장 그래픽카드 시장에 뜻밖의 경쟁자가 등장합니다. 바로 CPU 회사로 유명한 인텔입니다. CPU 내장 그래픽을 제외하면 외장 그래픽카드 시장에서는 점유율이 0이었는데, 갑자기 인텔이 외장 그래픽카드 시장에 도전장을 내민 겁니다. 사실 1998년에 인텔은 i740이라는 외장 그래픽카드를 출시한 적이 있었지만, 성능이 좋지 않아 1년 남짓 후에 단종시켜버린 역사가 있습니다.
처음 등장한 제품은 알케미스트Alchemist 아키텍처를 사용한 엔트리 등급의 Arc A380입니다. 엔트리 등급은 성능을 그다지 중요하게 보지 않지만, Arc A380은 성능이 지나치게 낮아서 도저히 경쟁사 제품과 경쟁할 수 없었습니다. 다행스럽게도 Arc A380은 중국과 OEM 시장에만 제한적으로 출시되었고, 일반 소비자용 그래픽카드는 몇 달 후에 출시한 Arc A770과 A750이 됩니다.
인텔이 먼저 10월에 Arc A770, A750을 출시합니다. CPU 시장에서는 굴지의 제조사지만, 외장 그래픽카드 시장에서는 도전자의 입장인 인텔은 하이엔드 보다는 먼저 메인스트림 제품을 출시합니다. 성능도 딱 그 정도여서 지포스 RTX 3060이나 라데온 RX 6600 XT에 해당합니다. 성능보다 부족한 건 드라이버 안정성인데, 이를 빠르게 해결하지 못한다면 인텔 앞에는 험난한 여정만 남아있을 겁니다.
▲ 왼쪽: 지포스 RTX 4090, 오른쪽: 지포스 RTX 4080
얼마 후, 엔비디아는 새로운 아키텍처를 사용한 지포스 RTX 4090을 출시합니다. 에이다 러브레이스Ada Lovelace를 사용한 3세대 레이트레이싱 지원 그래픽카드인데, 이번에도 엄청난 성능 향상을 이뤄내는 대단한 물건입니다. 11월에는 후속 제품인 지포스 RTX 4080을 출시합니다. 성능과는 별개로 RTX 4080은 여러 논란을 불러일으켰는데, 바로 12GB와 16GB 2개 모델로 출시를 예정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메모리 인터페이스가 12GB 모델은 192-bit, 16GB 모델은 256-bit로 낮아서 출시 전부터 굉장한 혹평에 시달립니다. 결국 12GB 버전 지포스 RTX 4080을 출시가 취소되었고 16GB 버전만 살아남습니다.
성능보다는 다른 곳에서 문제가 발생합니다. 지포스 40 시리즈는 새로운 16핀(12VHPWR) 보조전원을 사용하는데, 이를 일반적인 PCI Express 8핀 보조전원으로 변환해주는 젠더를 제공합니다. 그런데 이 젠더와 보조전원이 녹는 현상이 발생합니다. 말 그대로 불이 붙는 발화 현상입니다. 젠더를 꼼꼼하게 장착하면 문제가 없다지만, 불안한 건 사실이죠.
그보다 약간 늦은 AMD는 12월 신제품 출시를 목표로 11월에 라데온 RX 7900 시리즈를 공개합니다. 최상위 모델이 라데온 RX 7900 XTX, 바로 아래 RX 7900 XT인데, 접미사로 XTX를 사용했습니다. 마지막 XTX가 2006 출시한 라데온 X1950 XTX니까 굉장히 오랜만에 돌아온 셈입니다. 가장 중요한 건 가격입니다. 엔비디아는 이번 세대에서 가격을 올렸는데, AMD는 최상위 모델이 999달러로 이전 세대와 똑같이 유지했습니다. 그동안 뒤처져 있던 메모리 인터페이스도 엔비디아와 같은 최대 384-bit로 높아지며, 고해상도에서도 기대치를 한껏 높입니다. 하지만 라데온 그래픽카드는 지포스 대비 가성비가 월등하게 좋지 않으면 소비자들의 선택을 받지 못하므로 성능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 라데온 RX 7900 XTX/XT 언박싱 영상